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화권-러시아-만주 관계 (문단 편집) === [[근대]] === 그러나 [[건륭제]] 말년 및 이후에는 타민족과 백성들의 반란으로 계속 약해졌고 [[아편전쟁]]에서 패배당하면서 더욱 약해진 청나라는 1860년대, 영국과 프랑스 동맹군들에 의한 [[제2차 아편전쟁]]으로 더욱 큰 피해를 보자 [[러시아 제국]]의 [[청-러시아 국경분쟁|도움을 받아 협상금 등의 문제를 해결했지만 그 댓가로 연해주, 아무르 강 등 외만주 일대를 러시아에게 실질적으로 뺴앗기게 된다.]][* 간혹 만주로도 보기도 하는 사할린 섬의 경우 청나라가 이곳에 관리를 파견하는 등 지배했으나 제대로 된 지배를 하지 못했고, 1844년 러시아와 일본이 [[쿠릴 열도]]와 사할린 문제를 해결했을 때 청나라는 사할린의 자국 영유권을 주장하지 못했다.] 자세한 내용은 [[아이훈 조약]]과 [[베이징 조약]] 문서 참조. 또한 내만주와 중가리아와 몽골까지 간접지배하는 등 청나라 북부 지대는 러시아의 진출과 침략으로 인한 간섭이 심해졌다. 1871년에는 러시아가 [[동투르키스탄]]의 [[일리 강]] 유역을 점령하였고, [[발하슈 호]], 일리 강과 추 강 유역의 절반 등 중가리아 일부 등을 장악하였다. 1881년 상트 페테르부르크 조약을 통해 해당 지역의 러시아 제국의 주권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1890년대에는 [[청일전쟁]]의 패배로 청나라가 지배한 대만, 팽호제도와 더불어 [[요동 반도]]까지 일본에게 넘겨줘야 했다. [[파일:1024px-Chinese_Eastern_Railway-en.svg.png]] 외만주는 근대 후기부터 러시아 제국이 시베리아를 개척하면서 건설한 철도인 '철의 실크로드'라 불리는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지나는 곳 중의 하나이며, 소련 시기에는 많은 [[동유럽]], 러시아 및 인근 지역의 [[유대인]]들이 이 길을 통해 극동 지역으로 이주되기도 했었다. 러시아는 [[하얼빈]]을 대놓고 시베리아 횡단 철도가 연해주로 지나가는 요충지로 만들고 러시아식 신도시를 건설했으며 [[다롄]]을 러시아 제국의 항구로 삼으려는 계획을 세웠다. 러시아는 다롄을 [[러시아령 다롄|조차]]하고 [[의화단 운동]] 때 만주에 러시아군을 진군시켜 북만주를 병탄하려 했으며 [[러일전쟁]] 패배 전까지 만주를 실질적으로 지배했다. 1904년과 1905년에는 요동을 비롯한 만주 남부는 러일 전쟁의 격전지대가 되었다. 러일전쟁 이후 러시아는 만주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했으며, 일본은 요동 반도를 다시 얻고, 사할린 남부, 쿠릴 열도 남부 4개의 섬들도 러시아가 일본에 할양해서 일본의 땅이 되었다. 요동 반도에는 [[관동청]], [[관동군]]이 들어선다. 한편 [[중국 대륙]]에서는 이러한 청나라의 무능한 외교, 한계로 인해 실패된 여러 내부 개혁들, 부정부패와 한족 탄압 등에 대한 불만이 높아졌으며 [[틈관동]]으로 한족들이 만주로 대대적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